목공책 하나 들이셔요~

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사물놀이 공연을 보고 추억에 잠기다

저는 한명의 아들내미와 여섯명의 조카가 있는데 그 중에서 여자아이는 딱 한명입니다. 그 여자아이는 조카들 중 맏이이면서 유일한 여자아이니 귀염 엄청 받았더랬죠.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벌써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키도 저와 비슷해질려고 하니... 요즘 아이들 성장속도가 참 무섭습니다.

이 조카가 어제 국악경연대외에 참가한다고 하길래, 그것도 마침 처가가 있는 하남에서 한다길래 모든 식구들이 모여서 보러갔더랬습니다. 피아노도 꽤나 잘 연주하는 아이인데 초등학교에서 과외할동으로 사물놀이를 배웠나 봅니다.

언젠가부터 가끔씩 보면 혼자서 손가락으로 제 배나 허벅지를 두드리면서 장단을 연습합디다. 풍물 혹은 사물놀이를 한창 배우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일종의 금단현상입니다. 당구에 한창 빠졌을때 자리에 누으면 천장에 당구공 굴러가는게 보이듯이요.

초등학생이 사물놀이를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오... 그게 장난이 아니더군요. 조카아이는 6학년이 되면서 상쇠 자리를 맡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 아이가 속한 11명의 사물놀이팀이 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한 것입니다. 경연 순서는 두번째...

다소 떨릴수도 있는 자리이지만 태연하고 자신있는 표정들입니다. 사물놀이는 보통 4명~6명 정도로 구성하는게 보통입니다. 너무 많은 인원이 참여하면 악기의 섬세한 디테일이 잘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죠. 반면 풍물 혹은 농악이라고 하는 선반의 경우 되도록 많은 인원이 참여해야 파워있는 리듬과 역동적인 진풀이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1명의 사물놀이팀이라니 좀 의외이긴 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고 산만하겠구나... 왠만한 연습과 호흡이 아니면 굉장히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팀은 특이하게 여자아이들이 쇠(꽹가리)와 장구를 맡았고 남자아이들이 징과 북을 맡았습니다.

실제 아이들이 공연한 실황은 아래 동영상을 보시면 됩니다. 폰카로 급하게 찍느라 노출이 과다해서 얼굴이 다 하얗게 나와서 안타깝습니다.


대회규정상 5분 이내로 공연해야 해서 구성을 짜기가 더 힘들었을것 같습니다. 원래 사물놀이에 몰입하고 즐기려면 적어도 10분 이상은 몸을 달구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특별히 압축해서 가락을 구성했다고 하네요.

공연은 육채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내 삼채로 휘몰아가다가 이채와 짝쇠 주고받기로 마무리됩니다. 원래 짝쇠는 상쇠와 부쇠의 애드립이 볼만한데 공연시간이 짧다보니 하다 만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어찌보면 평범할 수도 있는 짜임이었지만 11명의 조화로운 사운드와 우렁찬 힘이 느껴지는 대단한 연주였습니다.

어린 줄만 알았던 조카가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은 상쇠로서 동료들과 눈을 맞추며 호흡을 이끌어내고, 지속적인 리듬을 유지하는 능력과 죄고 풀고 잠기다 솟아나는 감질맛이 꽤나 괜찮았다는 겁니다. 특히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관객들과 눈을 맞추는 것이 여간내기가 아닌듯 싶습니다.

끝나고 조카랑 얘기해 보았는데 중학교 들어가면 이제 사물놀이 못할 것 같아서 아쉽다고...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뭔가 성과를 거두고 싶다며 열심입니다.

어쨌든 결과는 풍물분야에서 2등을 차지했네요. 1등을 해도 손색이 없는 연주였는데 아쉽습니다.

조카의 공연을 보며 추억에 젖다

집에 돌아와서 오래된 사진첩을 뒤졌습니다. 저도 풍물에 빠져서 대학 생활 내내 풍물 동아리에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녔던 80년대 후반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라 많은 학생들이 공부보다는 시위와 운동 그리고 동아리 활동에 더 빠져 있을 때 였습니다. 저도 물론 그랬습니다.

학과 선배들은 저와 뜻이 틀려 잘 어울리지 않았고, 우연히 알게된 풍물 동아리의 선배/동료와 뜻이 맞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풍물 혹은 사물 그 자체에 대한 매력에도 흠뻑 빠져 들었습니다. 요즘은 풍물을 음악적인 측면만 부각시켜서 사물놀이라는 형태로 많이들 즐기지만 제가 풍물을 할 때는 장구나 쇠를 메고 진을 짜고 뛰어다니면서 연주하는 선반 위주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때가 제가 성인이 된 이후로 가장 날씬할 때였습니다. 59kg의 몸무게였으니까요.

풍물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시위대열의 제일 앞에 섰었고, 공연도 많이 하고, 강습도 많이 하고, 지방의 농악 전수관을 찾아 배우러도 많이 다녔습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해마다 여름방학때 있었던 농활(농촌 봉사활동)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농활을 가면 다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갔지만 저희 동아리는 지역 농민회가 짜주는 스케쥴대로 시골 부락과 장터를 다니며 풍물을 치곤 했습니다. 전라남도 함평군 전체를 순회공연한 셈인데 옛날 남사당패가 했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동네 들머리에서부터 굿거리 느린 가락으로 동네 어르신들을 다 불러내고 삼채 장단으로 흥겨운 춤마당을 만들곤 했습니다. 어슬픈 마당극도 하고 설장구를 치기도 했죠.

이때만 해도 사진기가 귀한 시절이라 남아있는 사진이 몇 없어 참 아쉽습니다. 저는 장구를 주로 메었습니다. 쇠는 상쇠가 없을때나 가끔 잡았는데 사진은 쇠잡은 것 밖에 없네요.


이 당시만 해도 풍물을 친다하면 다들 말리는 분위기였었죠. 풍물 하면 데모하는데 앞장 선다고 걱정하는 분위기였고, 잘 풀려봐야 딴따라라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김덕수, 이광수로 대표되는 풍물의 선구자들이 발군의 기량으로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타악을 연주함으로서 대중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물놀이는 우리나라 각 지역의 풍물놀이를 세련되게 가다듬고 재배치하여 만든 새로운 형태의 앉은반 리듬 음악입니다.

사물놀이가 변형된 것이 "난타"이구요. 초기의 난타 공연은 우리 전통 리듬이 많았지만 요즘은 창작도 많이 되고 세계 각국의 리듬을 많이 섞긴 하더군요. 이런 앉은반 위주의 공연도 좋지만 저는 아직도 장구를 메고 상모를 돌리며 진을 짜면서 뛰어다니며 연주하는 선반을 더 선호합니다. 태평소가 있으면 금상첨화구요. 사물놀이에만 너무 집중하지 말고 정통 풍물에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네요.

여하튼 조카의 사물놀이 공연을 보면서 오래된 앨범을 찾아 보게 되었고 빛바랜 사진들을 스캔해서 컴퓨터에 담아두었습니다.  저에게도 파릇파릇하던 10대 20대 시절이 있었더군요.  참 여러 생각이 들었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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